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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살아라/자유에 대하여

[제주도 5주살기] Ep 36. 마지막 오름, 그리고 영상편지

by aboutdesouffle 2025.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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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 채우고 싶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다음 날이면 떠나야 하기에, 시간의 끝자락을 붙잡고 싶은 조급함이 밀려왔다. 그래서인지 일찍 눈이 떠졌고 산책 겸 커피를 사러 나섰다.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다행히 아침 일찍 문을 연 카페였다. 창고를 개조한 공간은 와일드한 분위기였다. 빛바랜 벽과 야자수가 묘하게 어우러졌고, 큼직한 가구들이 여유롭게 놓여 있었다.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나오며 생각했다. ‘이제 따뜻한 커피가 어울리는 계절이 왔구나’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어떻게 하루를 보낼지 고민했다. 짐을 싸야 했고, 도서관에 반납할 책도 있었다. 선물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하루는 온전히 채워두고 싶었다. 그래서 동선짜기에 열중하던 중, 아이의 “당근김밥 먹고 싶어!”라는 외침에 가게를 찾아보니, 사장님의 치통으로 휴업 중이었다. 다른 가게를 찾아봤지만 문을 닫았거나 너무 멀었다. 결국 월정리에 있는 예쁜 주먹밥집으로 타협했다.

 

우리는 주먹밥을 테이크아웃해 월정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하늘은 지나치게 파랗고, 바다는 놀랍도록 투명했다. 돗자리를 깔고 주먹밥을 먹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그 순간은 완벽했다.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하며 달리고, 모래 위에 하트를 그리고 이름을 썼다. ‘제주의 바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그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해변을 떠나 성산읍에 있는 떡집에 들렀다. 부모님들과 할머니에게 보낼 선물로 오메기떡을 골랐다. 추석 전이라 배송이 걱정됐지만, 오늘까지 주문 가능하다는 말에 안도했다. 숙소 주인집에도 드릴 떡을 조금 샀다. 떡을 건네자, 할머니는 텃밭으로 나가 늙은 호박과 청양고추를 따 주셨다. “이건 직접 키운 거야.” 그 마음이 참 따뜻했다. 언젠가 이 마음이 그리워질 것 같았다.

 

짐을 싸다 잠시 숨이 막혀, 종달리의 북카페에 들렀다.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와이프는 당근밭과 시골집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따뜻한 공간이었다. 이곳은 미리 예약하면 다락방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스쳤다. 한쪽에서는 시인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원사업으로 공간을 제공받은 작가라 했다. 그의 조용한 손놀림을 보니, 책 한 권의 무게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아이는 책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엽서 한 장을 골랐다. 사장님은 종이꽃을 선물해 주셨다. ‘다음에 오게 된다면, 이곳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다가 나는 제안을 꺼냈다. “지금이라도 오름을 가자.” 와이프가 놀란 눈으로 날 봤다. “지금? 짐도 덜 쌌는데…”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와이프는 잠시 망설이다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간식과 물을 챙겨 차에 올랐다.

용눈이오름으로 향했다. 늦은 오후, 하늘은 약간 흐렸지만 바람이 시원했다. 오름의 초입에서부터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풀 냄새, 흙 냄새, 바람 냄새가 섞여 있었다. 길 옆에는 말들이 천천히 풀을 뜯고 있었다. 길을 막고 서 있는 말 한 마리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자연 안에 우리가 있구나.”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정상에 올랐을 때, 멀리 성산일출봉과 지미봉이 보였다.

 

무엇보다 뿌듯했던 건 ‘결국 올랐다’는 사실이었다. 아이와 함께. 그게 전부였다. 정상에서 바람을 맞으며 셋이 함께 서 있었다.
마지막 날이지만, 이상하게 시작처럼 느껴졌다.

 

아이의 배고프다는 말에 오름에서 내려와 성산읍의 흑돼지집에서 모둠구이로 마지막 저녁을 마무리했다. 기력이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와 남은 짐을 부랴부랴 챙겼다. 나는 무거운 짐을 차에 실었고, 와이프는 차곡차곡 패키징을 맡았다. 몇 번의 이사 끝에 짐 싸는 손발은 척척 맞았다. 모든 짐을 다 실은 뒤,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켜고 마지막 영상편지를 녹화했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될까. 우리는 조곤조곤 제주살이를 정리했다.

 

밤 10시가 가까운 시간, 아이가 말했다. “도베르만 있는 카페에 가고 싶어.” 아마 아이도 제주가 끝난다는 걸 느낀 걸 것이다. 우리는 짧은 고민 끝에 결국 그곳으로 향했다. 아이와 미니 축구 게임을 하고, 전신거울 앞에서 셋이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우리의 얼굴은 피곤했지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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