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일찍 눈이 떠졌다. 새벽 다섯 시. 이 곳은 동쪽이니 일출이라도 보러 가볼까 싶어 어둠을 뚫고 숙소를 나섰다. 조금 걸으니 구름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오늘 일출 보기 힘들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온 김에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종달항을 지나 방망세기 불턱까지 걸었다. 썰물이라 바다 한가운데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발밑을 보니 온통 보말이었다. ‘아, 이래서 제주에는 보말 음식이 많은 거구나.’ 그제야 이해가 됐다.

일출은 일몰과 다르다. 일몰이 하루를 감싸 안는 장면이라면, 일출은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다. 비록 구름에 가려 완전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희미한 햇살이 바다 위로 스며드는 그 순간 벅찬 기분이 들었다. 근처 불턱 안으로 들어서니 며칠 전 만났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역을 불에 구워 먹던 시절이 있었지.” “차가운 바다에서 올라온 어머니 허벅지가 얼마나 시뻘겋던지…” 그 말이 새벽의 바람처럼 스쳤다.


숙소로 돌아와 두 가족이 함께할 아침을 준비했다. 늘 하던 방식으로 차린 식탁이었지만, 함께 먹으니 분위기가 달랐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깔깔거리며 식탁 주위를 돌았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친구 가족에게 숙소의 정원을 소개하고 종달리를 함께 산책했다. 전날 밤늦게 도착한 터라, 그들에게 이 마을은 아직 낯설었다. 두 아이의 웃음소리에 이곳 풍경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구옥 숙소가 처음이라는 친구 부부도 마을의 분위기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이야기 중, 친구 아이가 제주에 오면 ‘말을 꼭 타보고 싶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몇 군데를 알아두었기에 광치기 해변 근처 승마체험장으로 향했다. 말을 본 순간 아이들은 눈이 반짝였다. 아이들의 말을 이끌던 할아버지는 정말 센스 있는 분이었다. 길가의 말똥을 가리키며 “이건 말똥 초콜릿이야, 유치원에 가져가서 친구들 줘야지!” 농담을 건네는 그의 입담에 아이들은 금세 마음을 열었다. 그 덕분에 겁먹지 않고 금세 말을 타며 즐거워했다. 날씨가 흐려 사진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 웃음들이 모든 걸 대신했다. 말을 타는 내내 나는 생각했다. ‘해변을 바라보며 정해진 길로만 가야하는 말들에게 자유란 어떤 의미일까.’

승마를 마친 뒤에는 지난번 들렀던 성산 수협 회센터로 향했다. 이번엔 생선 종류가 이전보다 많았다. 그중에서도 지난번 맛있게 먹었던 뱅에돔을 다시 주문했다. 수조 속의 자연산 뱅에돔은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힘찼다. 그물을 피하며 질주하는 모습을 보니 “진짜 자연산이구나” 싶었다. 기다림 끝에 받은 회 한 점은 역시나 쫄깃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숙소 매니저가 추천해준 카페로 향했다. 서울 마포에도 있는 유명 브랜드였지만, 이곳은 성산일출봉이 정면에 보이는 자리였다. 뷰가 압도적이었다. 아이들이 색연필로 일출봉 그림을 칠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작년만 해도 삐뚤빼뚤 색칠하던 아이가 이제는 빈칸 없이 꼼꼼히 채워 넣는 걸 보며 ‘아이의 시간은 정말 다르게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서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해가 기울 무렵, 근처 이탈리안 식당으로 향했다. 30초씩 번갈아 킥보드를 타며 이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질서 있게 줄을 서서, 차가 오면 멈추고, 다시 출발한다. 그 사이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비가 그친 제주, 하늘에 번지던 그 빛이 아름다웠다.


식당에서는 파스타와 리조또, 피자를 시켰다. 아이들은 식사를 잘했고, 어른들은 맥주도 함께 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아이들이 음악을 틀었다. 침대를 무대 삼아 공연이 시작됐다. 어른들은 침대 둘레에 앉아 관객이 되었다. 노래와 춤, 엉뚱한 멘트까지.. 아이들의 재롱에 웃음이 터졌다.
'네 멋대로 살아라 > 자유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주도 5주살기] Ep 35. 맑은 하늘 아래, 다시 셋 (0) | 2025.10.18 |
|---|---|
| [제주도 5주살기] Ep 34. 비 내린 하루, 경험의 문을 열자. (0) | 2025.10.17 |
| [제주도 5주살기] Ep 32. 비 오는 날의 책방, 그리고 기다림의 밤 (0) | 2025.10.16 |
| [제주도 5주살기] Ep 31. 바다와 책, 그리고 아이의 웃음 (1) | 2025.10.13 |
| [제주도 5주살기] Ep 30. 기억을 담는 일 (0) | 2025.10.12 |